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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에 물려줄 아름다운 유산, 국립공원. 우리는 자연을 보전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를 열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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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을 만든 사람들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옐로스톤(Yellow Stone)」
옐로스톤(Yellow Stone)

아름답고 신기한 자연경관과 소중한 자연자원 가운데 국가를 대표할 만한 지역을 국립공원(National Park)으로 지정하여 가꾸어가게 된 유래와 제도적인 이념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870년 8월 미국 몬타나주에서 워시번과 돈(Henry D. Washburn & Gustavus C. Doane)의 탐험대는 그때까지 몇 십 년 동안 소문으로 알려져 온 옐로스톤 지역의 놀라운 자연현상을 탐사하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옐로스톤 지역에서 "놀랍고 신비로운 자연현상"을 발견하고 서로 모자를 벗어 던지며 환호한 뒤에 1870년 9월 19일 밤 모닥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시민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이곳이야 말로 관광명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확실한 투자를 위한 공동소유를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대원 중 한 사람인 법률가 헤지스(Comelius Hedges)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처럼 신비한 곳을 개인의 사유지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모든 국민의 즐거움이 되게 해야 된다." 모든 대원들은 이 제의에 혼쾌히 동의했으므로 국가의 공원(National Park)으로 지정하자는 탐험보고서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놀랍고 신비로운 자연현황', '사유 아닌 공유', '모든 국민의 이용과 즐거움'이란 생각이 국립공원의 이념으로 정립된 것이었습니다.

  • 헨리 워시번(Henry D.Washburn )
  • 구스타부스 돈 (Gustavus C.Doane)
  • 코넬리우스 헤지스(Cornelius Hedges)

전국토의 토지 소유가 확정되어가던 무렵이며 땅 차지하기 경주가 한창이던 이 시기에 신생국가 미국의 미개척지를 사유화하지 않고 공공의 소유와 이용을 보장하기 위해 국립공원을 설립하자는 생각은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옐로스톤 지역에 대한 워시번과 돈 탐험대의 보고를 받고 정부 차원의 조사대가 현지답사를 마친 다음 입법 절차를 거쳐 1872년 3월 1일자로 옐로스톤이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 공포됩니다. 이 때 그랜트(Ulysses S. Grant) 대통령이 선언한 "모든 국민의 복리와 즐거움을 위한 공공적 공원이며 놀이터"라는 말이 국립공원의 또 다른 이념이 되고 있습니다.

옐로스톤국립공원 북문 루즈벨트 아치(Roosevelt Arch)에 새겨진 문구 '모든 국민들의 복지와 즐거움을 위한' (-For the Benefit and Fnjoyment of the People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규제와 제한 없이 땅을 소유할 수 있던 당시 미국의 풍토에서 어떤 개이나 단체의 소유나 한정된 이용도 인정하지 않는 공공성이 강조된 공원, 즐기는 놀이터로 지정함으로써 국민의 이익과 기쁨을 도모한 것은 획기적이며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제1호 국립공원「지리산」
1968년 2월 21일 촬영한 지리산 국립공원 항공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지정 논의는 1935년 일본인 다무라 등 학자들에 의한 '금강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건의'가 최초였으나, 광복 이후 1960년 초까지는 논의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1960년 FAO 등 국제교류관계로 우리나라에 온 클리지(Harold J. Coolidge) 박사와 클레란드(Raymond W. Cleland) 박사 등이 아름다운 풍경지역을 자원으로 한 국제관광의 진흥책으로 국립공원제도를 추천하면서 다시 관심을 받게 됩니다.

김현규박사 당시 정부는 지역개발 차원에서 국립공원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건축가 김중업씨와 농학자 김헌규 교수가 1962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제1차 세계국립공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과 미국에서 농업부문을 공부하고 해방 직후 미군정, 미국대사관의 농림부문 자문관을 지낸 김헌규 박사는 대회에서 국립공원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듬해인 1963년 1월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설치된 '지리산지역개발조사위원회'의 부원장으로 참여하여 지리산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 위한 조사·계획을 주관하게 됩니다.

지리산지역개발조사위원회의 현지 조사과정에는 주민들의 안내, 자료협조 등이 있었습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1963년 10월 25일에 총 700쪽 남짓한 지리산지역개발 조사보고서를 작성 제출하였습니다. 이 보고서는 지리산 지역의 자연·인문환경이나 산업, 문화, 생태, 사회 관련 부문의 세부적인 조사결과와 개발이용 계획을 제시했고 국립공원 지정과 관련해서는 약 40쪽에 걸쳐 제도도입 방안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 국립공원 지정조사단 모습
  • 지리산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

1964년 3월에 '구례연하반' 산악회는 군민대회를 열고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국립공원 추진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구례군 인구는 약 8만 명, 호구 수는 1만 2천 가구였는데 모두 회원으로 가입하여 추진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농촌의 경제사정이 매우 어려운 때였으나 극빈자 2천 가구를 제외한 1만 가구의 회원들이 매호당 10원씩의 회비를 자진 납부하여 10만원의 활동기금을 마련하는 등 온 군민의 열성이 표출되었습니다.

1964년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 발족 당시

구례군의 주민들은 지리산의 자원보호와 지역개발을 위한 국립공원의 지정을 촉구하는 주민 진정서를 거듭 제출하였으나, 당시에는 국립공원 지정에 관한 행정을 관할하는 기관이 없던 실정이었습니다. 1965년에 이르러 건설부는 공원법 기초에 착수하게 되었고, 이 법이 1967년 2월 6일에 국회를 통과하여 그해 3월 3일 법률 제1909호로 공포됨으로써 우리나라 국립공원제도의 틀이 잡혔습니다.

그 후 11월 24일 제1회 국립공원위원회, 12월 27일 국토종합계획 심의회를 통과하여 1967년 12월 29일 지리산국립공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립공원 전문 관리기구「국립공원공단」창설

1967년 지리산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이래 1987년 6월까지 우리나라는 국립공원의 지정, 공원계획 등 기본사항은 건설부가 점담하고, 공원 탐방객, 자원보호, 청소와 시설물 관리 등 공원 내 현장관리 업무는 지방자체단체가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자체의 관심도와 재정 능력에 따라 공원 간 심지어 공원 내 지역 간에도 심한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 급속한 도시화·산업화와 함께 자연환경 보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점차 제고되고 있던 차에 1985년 초여름 지리산국립공원에 일본 삼나무로 지어진 20여 채의 방가루 불법건설 보도가 계기가 되어 그해 감사원의 국립공원 관리실태 특별감사가 실시되었으며 많은 문제점이 부각되었습니다.

당시 감사원장은 국립공원 관리의 문제점 및 대책을 85년 12월 4일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후소조치로 건설부는 '86년 12월 한국경제사회연구원으로 하여금 국립공원관리제도 개선 방안을 연구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 국립공원 관리의 효율화를 위하여 공단 설립이 대안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현판식(1978.7.1) 이규호 건설부장관(왼쪽)과 박은영 초대이사장

공단 설립을 위한 자연공원법이 개정('86. 12. 31. 법률 4000호) 통과되어 1987년 7월 1일부터 시행되어 제1호 지리산국립공원이 지정된 지 20년 만에 비로소 현재의 국립공원 전문 관리기구「국립공원공단」이 창설되었습니다.

공단 제복의 변화
  • 80년대
  • 90년대
  • 현재
출처
글:국립공원 30년사(국립공원공단, 1998년 발간
사진 : 국립공원영상(http://tv.knps.or.kr/)/미국 국립공원청 웹페이지(http://www.nps.g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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